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잉 747 (문단 편집) == 개발사 == ||<-3> '''747의 아버지 조셉 프레데릭 "조" 서터 (Joseph Frederick "Joe" Sutter, 1921~2016)'''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slonnect.com/joe_sutter.jpg|width=25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boeingblogs.com/joe_sutter_ip.jpg|width=31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7px-Joe_Sutter%2C_Nova_Gorica%2C_June_2006.jpg|width=280]]}}} || || 747 프로토타입 롤아웃 시절 || 한창 활동할 무렵 || 2006년 || 조셉 F. 서터는 747 전 시리즈의 설계 팀장이며 최신모델인 747-8 역시 이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고 한다. 1921년생으로 미국 현지시간으로 2016년 8월 30일 [[http://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6-08-30/joe-sutter-engineer-who-led-boeing-s-747-jumbo-jet-dies-at-95|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보잉에서 747-8의 개발 감수를 하는 등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보잉의 디자인과 설계 고문으로서 활동했다고 하니, 가히 항공업계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이자 민항기 분야의 [[켈리 존슨]]이라고 불릴 만하다. 보잉 747은 1961년, 더글러스사의 C-133 카고마스터와 록히드사의 [[C-141]] 스타리프터를 대체하고 더 큰 화물을 옮길 수송기를 만들 미 공군의 '''CX-HLS'''(Cargo Experimental, Heavy Logistic Support) 사업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록히드와 더글러스, 제네럴 다이나믹스, 마틴 같은 회사들이 참여하였고 당연히 [[B-52]]와 [[C-135]] 같은 걸출한 폭격기와 수송기를 만들었던 보잉도 '''모델 750'''으로 참가했다. 미 공군의 요구는 최소 800Km/h의 속도와 86톤 이상급의 대형 화물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형 화물의 선적을 용의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선정된 3사의 제작사들은 각종 방안을 구상한다. * 더글러스는 기수 앞 부분이 조종석 부분과 함깨 통째로 열리는 구조를 채택했다. * 록히드는 비행기의 상부 부분을 척추가 튀어나오듯이 위로 약간 올려 1.5층 구조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1.5층 구조의 중간과 뒷부분을 승객실이나 화물실로, 앞 부분은 조종석으로 배정하였다. 또한 아래 기수에 위로 열리는 도어를 달아 선적이 용의하도록 디자인하였다. * 한편 보잉은 조종석을 아에 2층으로 위로 올려서 동체 전체를 화물실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원활한 적재를 위해 기수부의 측면으로 열리는 도어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모델 750의 동체모습은 747과 비슷한 2층 조종석에 뒤통수가 있는 형태가 되었다. 물론 군용수송기 특정상 화물 선적의 용이성을 위해 랜딩기어를 짧게 하고, 지상의 이물질을 방지하기 위해 주익이 높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이러한 모델 750의 모습은 747의 시초라고 할 수 있겠다. * 마틴과 제네럴 다이나믹스는 항공기의 목업이나 컨셉아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대형 수송기 제작 경험이 없어서 조기 탈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안들 중 더글러스사의 제안은 다른 기체에 비해 작았을 뿐만 아니라, 조종석이 아에 분리되는 구조라 조종계통을 분리하고 다시 결합해야 하는 기술적으로도 어려운 구조였다. 결국 록히드사의 제안과 보잉사의 모델 750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록히드는 화물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었지만 1.5층이라는 구조상 1층에 실리게 되는 화물의 높이가 제한되는 단점이 있었고, 보잉은 화물실의 높이가 더 높아 화물 크기에 제약이 덜했지만 록히드보다 화물 수송량은 낮았다. CX-HLS사업에서는 록히드가 86톤의 수송 요구조건보다 훨신 높은 122톤의 화물 수송을 수송할수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 록히드가 승리하였고, 이로서 오늘날에도 활약하는 록히드 [[C-5]] 갤럭시가 탄생하게 됐다. 이렇게 보잉은 1965년에 록히드사의 [[C-5]]가 최종 채택되며 군 수송기 경쟁에서 떨어졌다. 모델 750 같은 경우 실물 크기의 화물실 목업을 만들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설계가 완성된 편이었는데, 보잉은 이렇게 완성된 기초 설계를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당대 미국 최대 항공사인 [[팬 아메리칸 항공]]의 창립자이자 사장이던 후안 T. 트리페(Juan T. Trippe, 1899~1981)가 자신의 친구이자 보잉사의 사장인 윌리엄 M. 앨런(William M. Allen, 1900~1985)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사실 후안 트리페 회장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보잉에 '707의 2.5배 정도 되는 여객기를 제작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대형기에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에 들어 항공여행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DC-8과 707보다 큰 여객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계획이었다. 이 제안이 747기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5년에 팬암의 후안 트리페 회장과 보잉의 윌리엄 M. 알렌 회장은 1965년 여름휴가를 알래스카에서 함께 낚시하는 것으로 보냈고, 이때 이 둘은 미리 선약된 계약을 맺으면서 보잉 747을 본격적으로 처음으로 언급했으며, 팬암은 1966년 4월 13일에 보잉의 50주년 기념식에서 25대의 보잉 747을 당시 가치로 5.25억 달러[* 2022년 가치로는 약 48억 달러다.] 가격을 주고 주문하며 거의 반 세기 동안 상업용 여객기에 대한 단일 주문 최고치 기록을 유지했다.[* 이 기록은 2013년 11월 18일에 두바이 에어쇼에서 [[에미레이트 항공]]이 [[보잉 777X]] '''150대'''와 [[A380]] '''50대''', 이렇게 총 '''200대(!)'''의 비행기를 주문하며 완전히 깨졌다.(다만 도중에 24대의 주문을 [[보잉 787]]로 바꿔서 실제 777X 주문량은 126대가 되었다.)][* 참고로 팬암 다음으로 747-100을 많이 보유했던 [[트랜스 월드 항공]]의 747-100 총 보유수가 25대였다. 그리고 팬암은 첫 주문 후에도 계속 747-100을 주문하여 1991년에 파산할 때까지 총 44대의 747-100을 운용했다.] 팬암은 이전에 [[보잉 707]]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공계의 VVIP로서 보잉 747의 기본 외형부터 사양까지 모두 결정하는 등 개발에 깊게 관여했는데,[* 그 일례로 후안 트리페 회장은 화물기로서의 747 활용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결국에는 군용 수송기였던 모델 750처럼 기수부로 화물을 원할하게 선적할 수 있도록 콕핏, 즉 기수부만 2층에 둔 설계로 바꾸도록 지시하였고, 이렇게 반세기동안 베스트셀러 여객기로 판매된 747의 외형이 확립되었다. 747 개발 초기에 2층은 1등석 승객들을 위한 라운지로 설계되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어퍼덱에도 탈출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어퍼덱도 창문의 수를 3개에서 10개로 늘리고 길이도 늘린 후 좌석(주로 비즈니스석)을 배치하는 식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이후 항공 및 보잉 역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상 최대 단일 항공사가 한 항공기 설계에 관여한 사건이라 하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잉 및 항공업계에 없을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오일 머니로 인한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유명한 [[에미레이트 항공]]도 보잉의 VVIP이지만, 747 개발 당시의 팬암 수준으로 [[보잉 777X]]의 개발에 관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팬암은 한때 보잉 747의 설계 팀장인 조 서터와 잡음이 있어 알렌 회장에게 최고 기술자 교체를 요구한 적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팬암과 서터간 갈등의 일례로, 당시 팬암과 서터는 '동체 설계를 2층 협동체나 1층 광동체([[A300-600ST]]처럼 조종석이 메인 덱 밑에 있도록 설계된 4발기와 [[보잉 727]]과 유사한 생김새의 3발기가 설계되었다고 한다.) 중 어느 것으로 제작할 것인가'라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비상시 안전 문제 때문에 후자를 원했던 서터는 팬암에게 광동체 설계를 밀어 붙이기 위해 자신보다 타협을 잘한다는 최고 내부 디자이너를 팬암 본사에 보내 동체의 너비와 같은 길이의 실을 가져오게 한 후 팬암에게 광동체로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목업으로 고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보잉 747의 초기 설계안 모형.jpg|width=100%]]}}}|| || '''1967년경에 제시된 보잉 747 설계안 모형''' || 1967년경에는 전술한 것처럼 후대에 나온 [[A380]]과 유사한 겉모습의 2층짜리 협동체(3-3)로 747 설계를 변경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날개가 1층을 가로막아 1층을 두 구간으로 쪼개야 했던 데다가 대피 경로가 복잡해지고 화물 운송 능력이 축소됨에 대한 우려로 이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참고로 서터는 이 설계안을 '칠면조'라 부르며 조롱했다. 거기에 1968년 기준으로 747 개발에 든 프로그램 비용은 1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85억 달러(약 10조 2천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보잉은 747 개발과 새 공장 건설에 너무 많은 돈을 써서 보잉은 기업의 존폐 위기까지 몰릴 정도로 엄청난 부채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보잉의 부채는 2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은행에 빚진 12억 달러는 당시 미국의 모든 기업의 은행 부채를 합친 기록을 능가했다고 한다.] 참고로 보잉 747 설계 시작부터 747이 처음으로 롤아웃되기까지는 통상적인 기간의 2/3인 28개월이 걸렸는데, 이 빠른 작업 속도에 당시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악스러운 반응까지 보였다고 한다. 여하튼 1968년 9월 30일에 세계 각지의 언론인들과 747을 주문한 26개 항공사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에버렛 공장에서 최초의 보잉 747인 [[N7470]]이 롤아웃되었고, 1969년 2월 9일에 N7470은 처음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후 동년 3월 5일에 2번째 생산기이자 양산 1호기인 [[N747PA]]가 팬암 도장을 입고 롤아웃되었고, 동년 6월 초에 있던 파리 에어쇼에서 보잉 747이 처음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거기에 보잉은 당시까지만 해도 747만큼 거대한 여객기를 조립할 만큼 큰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는데, 약 50개 도시를 검토한 결과 원래 보잉의 공장이 있던 워싱턴주 시애틀로부터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워싱턴 주 에버렛 근처 [[페인 필드]]의 군사 기지에 인접한 부지에 새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966년 6월에 3.2제곱킬로미터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날에도 용적 기준으로 가장 큰 건물로 남아있는 새 공장을 짓는다. 이 공장은 팬암이 1991년에 파산한 후에도 보잉의 광동체 여객기를 제작하는 장소로 쓰이게 된다. 알렌 보잉 회장도 후에 "(보잉 747 개발은) 우리에게 너무 큰 프로젝트였습니다."라고 회고할 만큼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747은 본래의 군용 화물수송기에서 여객기로 구조 전환을 완료하며 1969년 12월 12일에 팬암에 인도된 N733PA를 시작으로 여러 항공사들에게 인도되기 시작하였다. 보잉 747의 최초 상업운항은 팬암 소속의 [[N736PA]]가 운항한 1970년 1월 22일자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런던]] [[히스로 공항]] 노선 운항이었는데, 이 비행에서 N736PA는 335명의 승객과 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오전 1시 52분(동부 표준시 기준)에 뉴욕에서 이륙하여 6시간 43분 뒤인 오후 1시 35분(GMT 기준)에 런던에 착륙했다. 이 비행의 승객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 여배우 라켈 웰치(Raquel Welch, 1940~)도 있었다.[* 사실 원래 747 최초의 상업비행에 투입될 기체는 N735PA(Clipper Young American)였는데, 이 기체가 이륙 전에 활주로에서 4번 엔진에서 초기 JT9D-3A의 고질적인 엔진 파이핑 문제가 발견되어 이륙하지 못하고 되돌아와 6시간 동안 비행이 지연되었다.] 이 비행 이후 보잉 747은 급속도로 빠르게 다른 항공사들에게 인도되어 운용되기 시작했는데, [[트랜스 월드 항공]](1970년 2월 25일), [[아메리칸 항공]](1970년 3월 2일)[* 정확히는 팬암에게 임대받은 747로 운항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자사가 소유한 747의 운항도 시작했다고 한다.], [[루프트한자]](1970년 4월 26일), [[에어 프랑스]](1970년 6월 3일), [[알리탈리아]](1970년 6월 5일), [[노스웨스트 항공]](1970년 6월 22일), [[컨티넨탈 항공]](1970년 6월 26일), [[일본항공]](1970년 7월 1일), [[유나이티드 항공]](1970년 7월 23일) 등 팬암의 747 운항 시작 후 약 반년 동안 무려 9곳의 항공사가 747을 추가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하게 된다.[* 선배인 [[보잉 707]]이 팬암에 의해 운항이 시작된 이후 1년 내에 추가적으로 운용을 시작한 항공사가 겨우 5곳뿐이었던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사실 이는 더글라스가 제트기 이전 시대의 여객기 업계에서는 보잉보다 더 명성이 높았고, 보잉은 그 당시에는 여객기 업계에선 평판이 안 좋았던 게 컸다. 참고로 [[DC-8]]은 1959년 9월에 운항을 시작한 후 1년 동안 11곳의 항공사가 운항을 시작했다.] 다만 보잉 747은 당시 여객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큰 기체였기 때문에[* [[보잉 707]]조차 대형 여객기 취급받던 시절에 707의 2.5배에 달하는 747이 어떻게 느껴졌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747-100만큼은 3~5대 이내로 보유한 항공사가 은근히 많았다고 한다[* 전술한 극초기의 747 보유 항공사 중에는 루프트한자(3대), 알리탈리아(2대)가 이에 해당된다. 물론 747이 대중화된 후에는 루프트한자와 알리탈리아처럼 747-100을 적게 주문한 항공사들과 [[싱가포르항공]]처럼 아예 주문을 안 했던 항공사들도 많은 747을 주문하게 된다.]. 그리고 보잉은 원래 초음속기로 출시될 예정이었던 [[보잉 2707]]을 주력으로 밀고, 보잉 747은 전 세계 항공 노선이 초음속으로 대체되기 전 임시 방편 정도로 쓰이다가 이후에는 화물기 위주로 쓰이게 될 것일 것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보잉의 마케팅 담당자는 '오직 50대의 747만이 여객용으로 팔릴 것이다'라고 예측했으나, 결론적으로 보잉 2707은 아예 개발이 취소되고 오히려 실패할 것으로 보았던 747 여객기는 반세기 가까이 베스트셀러 여객기로 팔려나가며 보잉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게 되었다. 한편 보잉사와 함깨 CX-HLS 사업에 모델 750의 엔진공급사로 참가했다가 떨어져 낙담하던 프랫 앤 휘트니도 747의 성공에 덩달아 엔진을 공급하게 되어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이 747의 엔진이 바로 프랫 앤 휘트니 [[JT9D]] 엔진인데, JT9D 엔진은 이전의 터보팬 엔진보다 연료를 1/3 적게 소모하면서도 출력은 초기 터보제트 엔진의 2배나 달했기 때문에 보잉 747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 도움을 줬다. 후에 747 뿐만 아니라 [[보잉 767]], [[DC-10]], [[A300]]같은 민항기에도 쓰이게 되는 베스트셀러 엔진이 되었다. 이후에 JT9D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PW4000]] 역시 여러 기종에 적용되며 재미를 보았다. || [[파일:747-100 기내 사진.jpg|width=100%]] || || '''팬암 소속 [[보잉 747-100]]의 기내[* 사진 속 기체는 N737PA로, 촬영 당시 기준으로는 미국의 국내선 항공사였던 [[이스턴 항공]]에 임대 중이었다. 참고로 이 사진은 1971년 4월 5일에 촬영되었다.]''' || 상단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운항 초기에 747-100과 747-200의 일반석에는 3-4-2의 9열 좌석을 배치했으나, 점차 항공 여객 수요가 늘어나면서 승객을 더 많이 싣게 하기 위해 197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처럼 3-4-3의 10열 좌석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후술할 어퍼덱의 1등석 라운지도 1970년대 후반부터 사양세에 접어들고 그 대신에 비즈니스석 위주로 좌석을 배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